2024년08월10일 37번
[과목 구분 없음]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1점]

- ① 의열단 창설을 주도함
- ②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함
- ③ 어린이날 제정에 기여함
- ④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됨
(정답률: 62%)
문제 해설
정답> ③
'이달의 독립운동가'라는 제목 아래 방정환(1899년~1931년)이 제시되어 있다. 주요 활동으로 '경성 청년 구락부를 조직함', 천도교 소년회 조직 등 소년 운동을 전개함'이 차례로 나와 있다.
소파 방정환(1899~1931)이 주도한 천도교 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은 1923년 5월의 일이다. 같은 해 3월에 잡지 어린이도 발간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의열단 창설을 주도한 인물은 약산 김약봉(1898~1958)이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되었다(원봉이 조직했다는 주장에 대한 유력한 반론* 있음).
*의열단을 ‘창단’할 수 있었던 것은 김원봉 1인이 아니라 한말의 의병 투쟁, 대한 광복회의 의열 투쟁, 그를 이은 일봉 김대지(1891~1943), 백민 황상규(1891~1931)와 같은 이들의 의열 정신과 경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설득력 높은 견해가 있다[줄리아 리(김주영),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2014)].
③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손기정(1912~2002)을 들 수 있다. 손기정은 1936년 8월 1일에서 16일까지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때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없앤 기사를 처음 보도하였고(8월 13일), 이후 동아일보가 이 사진을 다시 게재하였다가 무기정간처분을 당하였다(8월 25일,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 참고로 남승룡(1912~2001)도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④ 을사늑약 강요의 불법성을 폭로하기 위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인물로는 보재 이상설(1870~1917), 일성 이준(1859~1909), 이위종(1887~?) 3인이 있다[헤이그 회의가 개최된 것은 6월 15일(~10월 18일까지 개최)][호머 헐버트(1863~1949)가 사실상 제4의 특사라는 유력한 설 있음**]. 이들 3인의 헤이그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회의가 이미 시작된 직후인 6월 25일이며, 특사들은 7월까지 활동하였다(7월 14일 이준 열사 순국).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결국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 체결, (대한 제국)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다(각 1907.7.20/1907.7.24/1907.8.1).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이미 1906년 6월에 특사로 임명되어 을사늑약으로 폐쇄됐던 9개국 공사관의 부활을 위한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헤이그 특사를 헐버트를 포함한 4인으로 봐야 한다는 유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라는 제목 아래 방정환(1899년~1931년)이 제시되어 있다. 주요 활동으로 '경성 청년 구락부를 조직함', 천도교 소년회 조직 등 소년 운동을 전개함'이 차례로 나와 있다.
소파 방정환(1899~1931)이 주도한 천도교 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은 1923년 5월의 일이다. 같은 해 3월에 잡지 어린이도 발간하였다.
오답 해설>
① 의열단 창설을 주도한 인물은 약산 김약봉(1898~1958)이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되었다(원봉이 조직했다는 주장에 대한 유력한 반론* 있음).
*의열단을 ‘창단’할 수 있었던 것은 김원봉 1인이 아니라 한말의 의병 투쟁, 대한 광복회의 의열 투쟁, 그를 이은 일봉 김대지(1891~1943), 백민 황상규(1891~1931)와 같은 이들의 의열 정신과 경험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설득력 높은 견해가 있다[줄리아 리(김주영), 『줄리아의 가족 순례기』(2014)].
③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손기정(1912~2002)을 들 수 있다. 손기정은 1936년 8월 1일에서 16일까지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때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없앤 기사를 처음 보도하였고(8월 13일), 이후 동아일보가 이 사진을 다시 게재하였다가 무기정간처분을 당하였다(8월 25일,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 참고로 남승룡(1912~2001)도 손기정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하여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④ 을사늑약 강요의 불법성을 폭로하기 위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인물로는 보재 이상설(1870~1917), 일성 이준(1859~1909), 이위종(1887~?) 3인이 있다[헤이그 회의가 개최된 것은 6월 15일(~10월 18일까지 개최)][호머 헐버트(1863~1949)가 사실상 제4의 특사라는 유력한 설 있음**]. 이들 3인의 헤이그 특사가 헤이그에 도착한 것은 회의가 이미 시작된 직후인 6월 25일이며, 특사들은 7월까지 활동하였다(7월 14일 이준 열사 순국).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결국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 신협약 체결, (대한 제국) 군대 해산으로 이어졌다(각 1907.7.20/1907.7.24/1907.8.1).
**호머 헐버트(1863~1949)는 이미 1906년 6월에 특사로 임명되어 을사늑약으로 폐쇄됐던 9개국 공사관의 부활을 위한 외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도 적극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헤이그 특사를 헐버트를 포함한 4인으로 봐야 한다는 유력한 견해가 제기되었다.